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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

나 솔 2020. 5. 21. 00:11

 

 

 

 

 

 

1.서론

국어사 연구는 국어가 겪어온 변화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밝혀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용비어천가에는 오늘날 사용하지 않는 문자와 단어가 있어 현대어의 지식만으로는 뜻을 이해 할 수 없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언어는 돌발적인 변화보다는 어느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보통의 변화로 국어에 쓰인 고전문학 작품들을 올바로 읽게 하는 길잡이로는 국어사 연구인 것으로 국어사란 국어의 음운, 형태, 통사, 의미 등의 변천을 기술한 국어의 역사를 말하며 국어사의 연구는 우리말의 계통과 형성을 밝히고, 음운이나 형태, 통사 등의 통시적인 변천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학문으로 국어사는 단순히 문자의 변화가 아니라 음운 체계, 어휘 체계, 문법 체계 등의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체계상의 변천을 의미한다. 국어사의 시발점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언어는 넓은 의미의 부여, 한조어의 고대단계를 대표하고 있으며, 고대국어라는 말은 신라어를 가르킨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에 따라 국어사 시대구분방법과 각 시기의 언어적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2.국어사 시대구분

-고대국어 시기

신라어의 시기는 개국으로부터 멸망 935년까지 천년 안팎의 오랜 시일에 걸치고 많은 변화와 시기를 몇 단계로 나뉘어야 하지만 전하는 자료가 부족하여 불가능하다

-중세국어의 시기

10세기에서 16세기까지 7세기에 걸쳐있고 14세기를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진다.

전기 중세 국어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처음 200년에 해당하며 주로 한자로 표기된 자료에 의하였으며, 후기 중세국어는 훈민정음 자료에 의하였고15세기 중엽은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주목 받았으며 주된 이유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 문자로 문헌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근대국어의 시기

임진왜란이 지난 직후 17세기 초엽부터 시작 되었고 임진란은 중세어와 근대어와의 사이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제변화의 요인은 아니다

-현대국어의 시기

20세기 초엽부터 오늘날까지이며, 9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이 어휘에서 확인되고 현저하지만 음운과 문법에서도 나타난다.

 

3.국어의 형성

고조선에 관해서는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고조선'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으로 이들 고유명사가 한자로 기록된 시기는 후대의 일로써 이 이름들이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부여계 제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서력 기원 전후의 만주와 한반도 언어 상태를 추정해보면 숙신계, 부여계, 한계의 3대 어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부여계 제어는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어, 예어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계제어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에 대한 위치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견해를 달리 하지만 마한지역에서는 백제, 진한 지역에서는 신라,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가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있다. 해당지역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있고 지역 한자음에 대한 어원적 해석이 시도된바 그중 '碑離'가 나타나는 사실에 주목하고 '비리'는 백제 지명에 보이는 '夫里'신라 지명에 보이는 '伐', '火'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모여산 거주지를 뜻하는 말인 것으로 생각되고 삼한의 언어들은 서로 닮은 점도 있고 서로 다른 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

고구려어는 현전 자료를 가진 부여계 언어로서 남아 있는 자료로는 내외 사적에 나오는 고유명사로 '삼국사기' 지리지 권 37이 기본 자료이며 권 35는 보조 자료로 사용되고 권 37에는 하나의 지명에 대하여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이 발음으로만 읽는 표기인 음독명과 한자의 새김으로 읽는 석독명으로 병기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알타이계 언어로서 신라어에 가까우며 퉁구스 제어와도 가까운 면을 보여주며 일본어와는 친족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제어

고구려어와 같은 부여계의 한인어를 말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백제에서는 지배족을 부여계 언어로 사용하였고 피지배족은 마한계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남아있는 백제어 언어가 신라어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백제어는 마한어의 계속으로서 부여계 언어의 상층을 가지고 있었음이 특징이다. 백제어는 남아있는 자료 중 고대 삼국의 언어 중 가장 적다. 백제어는 신라어나 중세 국어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단어들이 드러나고, 신라어와 매우 비슷하였으나 어휘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어

신라어 중심의 한반도 언어 통일 과정에서 최초의 큰 사건으로는 6세기의 가야의 합병을 특기할 만하고 7세기 후반에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함으로 신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이로 인해 신라어 중심의 한반도 언어적 통일이 가능했고 통일신라의 성립은 국어 형성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10c 초까지 경주 중심의 신라어 영향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까지 파급되었을 것이며 상대 신라에서 하대 신라에 이르기까지 서라벌의 언어가 신라어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중세국어

10세기초 개경을 중심으로 고려 왕조가 건설되고 경주에서 개성으로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 옮겨지고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의 국어는 개성에서 형성된 고려 중앙어의 성립으로 새로운 단계를 중세국어라고 하며 개성 방언으로 형성된 것으로 중세 국어는 신라어를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북방의 부여계 언어, 남방의 한계 언어가 있었고 고구려어 자료를 통해 부여계제어 계통적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4.문자 체계

한문의 정착-한자는 우리조상들이 접한 최초의 문자로서 고대 동아시아 유일한 문자 였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한문의 정착의 과정이나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러 자료가 증거로 남아 있음을 보아 고대 삼국에서 일찍이 한문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고 입으로는 우리말을 했지만 글로 쓰는 것은 중국어를 쓰는 언문 이치라는 기형적인 상태였던 것이다.

 

고유명사 표기-한자차용 표기법으로 표의적 기능과 표음적 기능의 두가지 원리가 있다. 표음적 기능만을 취한 것을 음독자라 부르고, 표의적 기능을 가진 것을 석독자 또는 훈독자라 한다. 이로인해 지명이나 인명을 두 가지로 표기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두-이두의 명칭은 이토, 이도, 이서 등으로 나타나고 이두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었지만 신라에서 발달되었으며 이두는 국어의 문장구조를 다르고 조사, 어미까지 표기했으며 신라 이두의 예는 『임신서기석』에서 볼 수 있다. 기형적인 문어라고 할 수 있는 이두가 오래 사용 된 것은 이서들 사이에서 깊은 뿌리가 있었고, 문자 생활의 상층부를 이루었던 한문의 후광을 입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구결-구결은 신라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입겾’ 또는‘입겿’의 한자 차용 표기로 흔히‘吐’라고 하며 『세종실록』과 언해본에 나타나며 한문을 읽을 때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기 위함이며 구결에는 두가지 방법으로 음독구결과 석독 구결로 음독구결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방법이다.

 

향찰-고유명사 표기법과 이두 및 구결의 확대라고 할 수 있으나 향찰 체계는 복잡했으며 음절구조가 복잡하고 수가 많은 국어를 만족스럽게 표기하지 못하였으며 향찰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향가에 국한되어 있다.

 

훈민정음-훈민정음 창제는 국어의 완전 문자화이고 한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적 문자 체계로서 훈민정음의 두드러진 특징은 독창성과 과학성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는 했으나 한문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고 사대부들은 여전히 한문을 썼으며 소수만이 언문에 관심을 보이며 특수한 경우에만 언문을 사용했다. 이 문자가 온국민의 문자로 지위를 확립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와서 였다.

 

5.시기별 특징과 언어 활용

1)고대국어

신라어 시기는 개국으로부터 멸망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신라에 대한 시기는 세분화 되어야하나 자료의 제약 때문에 불가능하며 신라어에 대한 변화도 한두 차례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어렵다.

-자료

고유명사가 실려 있는 역사책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인명, 지명, 관명 등이 주가 되고 중국, 일본 역사책도 참고가 된다. 고유명사는 언어 자료로 이용하기 적당하지 않으나 두 역사책에는 신라어 단어에 대한 어원 해석을 싣고 있어 참고가 된다. 이두 자료는 신라시대 것은 드물지만 일차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향찰 표기에도 이두요소가 나타나므로 참고가 된다. 향찰 자료로는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는 고대 문학의 소중한 유산이며 고대국어 연구에 귀한 자료이다.『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 11수도신라어 자료로 다루어 진다 균여는 신라말 고려초 사람으로 이들 노래에서신라의 문학어를 쓴 것으로 보여지며 11수와 14수의 표기법에는 차이가 보인다. 중국 역사책 『양서』,『신라전』 에 신라어 몇 단어가 적혀 있다. 고대 일본어가 들어간 차용어가 있고 고대 삼국의 어느 언어인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신라어의 재구에 참고 자료로 이용 될수 있고 고대 일본은 정치, 문화 분야에서 우리나라 것을 받아들인 것이 차용어 검토에서 드러났다. 우리나라 전통적 한자음에서 신라어 음운 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표기법

신라어에 대한 많은 연구는 있었으나 현재 자료로는 석독자와 음독자를 가리기 어렵고 음이나 새김을 정확히 재구하기 어려운 점이있다. 음독자에 대해서 신라시대 용자법은 체계적이었으며 고유명사 표기에서 향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고 석독표기에 쓰인 한자는 음을 읽지 않고 새김으로 읽으며 석독자의 사용은 광범위 하지만 독법의 재구에는 문제가 많으며 한자의 새김은 보수적이어서 고대전통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예가 많다.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서는 혼합표기도 있으며 향가의 표기인 향찰은 혼합표기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고 향찰의 표기에서 어휘적 의미를 지닌 부분은 석독표기이고 문법적의미가 있는 것은 음독표기를 원칙으로 했다. 예외로는 ‘如’(다)는 석독자이지만 어미에 사용된 것이 예외이다.

-음운

자음체계. 고대에서는 음절말 자음의 내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고대국어에서는 ‘ㅅ,ㅈ’의 자음이 음절말 위치에서도 음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叱’ 자가 후대에 사이시옷으로 쓰였고 헌화가의 『折叱可』(것거),혜성가 ‘城叱’(잣)등에도 쓰인 것으로 이것이 음절말 ‘ㅅ’을 나타내고 있다.

모음체계와 모음조화

고대국어에서도 전기 중세국어와 마찬가지로 7모음 체계였던 것으로 음가는 같지 않았고 국어의 모음체계는 14세기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고대국어 자료로는 모음조화의 증거가 보이지 않으나 고대국어에서 모음조화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자음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음은 신라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한자음을 한국한자음이라 하기도 하며 줄여서 동음이라 부르기도 했다. 특징으로는 중국의 상고음 또는 중고음의 입성 운미 -k,-t,-p 중에서 -t를 ‘ㄹ’로 발음한다는 ‘ㄹ’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문법

고대국어 문법체계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향가와 이두문이 있으나 양이 적어 문법적 특징을 단편적으로 볼 뿐이고 용언의 활용으로 신라어 자료는 국어의 복잡한 활용체계가 고대에 확립되었으며 활용어미는 선어말어미와 어말어미로 나누어지고 기능에 따라 동명사, 부동사, 정동사어미로 나누며 동명사는 문장의 명사 구실을 하고 다른 명사 앞에 쓰일 때에는 관형어 구실도 한다. 경어법체계로는 중세와 다를바 없으며 향가에서는 존경법과 겸양법이 확인되고 선어말 어미에 의존하고 ‘腸’(시)와 ‘白’()에 의해 표시된다. 신라어 어휘는 중세국어의 어휘와 일치함을 알 수 있고 수사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자어로는 한자어 이름의 등장은 국어 어휘의 역사에서 큰 변혁의 시초로 국어에 큰 자국을 남겼고 고대국어는 한자어 침투에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다.

 

2) 전기 중세국어

자음체계 된소리 계열의 등장을 특징으로 된소리는 단어 도는 형태소의 연결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고대에서도 속격 ‘叱’(ㅅ)이나 동명사 어미의 ‘尸’(ㄹ)뒤에 오는 단어의 두음 ‘ㅂㄷㅅㅈㄱ’ 등이 된소리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된소리는 어두에 나타남으로써 음운 체계속에 자리잡게 된다. 『계림유사』는 어두자음군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자음중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파찰 발음이다. 유성마찰음 ㅿ에는 『계림유사』의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것과 13세기 이후에 ‘s>x’의 변화로 나타난 두종류가 있었고 『계림유사』와 『향약구급방』은 ‘ㅿ’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ㅿ’ 음절말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ㅸ’는 전기 중세어 자료에는 보여지지 않으나 ‘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한자로 는 표기가 불완전하여 나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음절말 자음은 자음 대립이 음절말 위치에서 유지된 것으로 『계림유사』의 표기에서 ‘皮曰渴翅’ (갗),‘面曰桍翅’()은음절말 ㅊ을 나타내고 있다. 『향약구급방』 음절말 자음들을 구별하고 있다.

모음체계는 차용어 검토에서 나타나고 『계림유사』 의 모음표기는 조잡하지만 대체로 몽골어 차용에서 본사실과 일치하며 전기 중세국어의 모음체계는 고대국어의 모음차이와 큰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 중세국어의 모음체계와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몽골어 차용어들이 들어온 것은 13세기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사는 고려의 일부 관직에 원나라의 것이 그대로 사용 되었음을 보여주며 차용어는 말과 매에 관한 것들과 군사에 관한 것들도 있다.여진어 차용어로는 함경도 지명에 흔적이 남아 있고 대표적인 예는 두만강으로 용비어천가 에 (豆漫)‘투먼’ (江)강이라 한 바와 같이 강이름은 여진어 ‘土滿’에서 온 것이다. 한자어로는 중세국어에 와서는 한자가 격증했고 고려 광종 9년에 과거제도 실시가 자극이 되어서 고려시대에는 문인, 학자, 관리들까지 구어로서 우리말을 사용하고 문어로는 한문을 사용하는 기이한 형태였다. 문화적, 학술적 용어는 한자에 의존하고 국어는 한자에 압도되고 한자 어휘는 상류 계급의 것으로 평민의 모방의 대상이 되면서 예로부터 내려오던 국어단어가 한자어에 밀려 소멸되기 시작했다.

 

3)후기중세국어

훈민정음은 초성 17자 중성 11자의 28자이며 독창적인 방법으로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의 3분법 원리로 나누었으며 초성 17자의 제자 원리는 첫째는 상형의 원리이고 둘째는 가획의 원리로 구분된다. 15C 맞춤법의 1차적 원리로는 음소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훈민정음의 8종성을 규정한 것도 음소적 원리라 할 수 있다. 2차적 원리로는 음절적이라 할 수 있다. 한자음 표기법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국정운식표기가 있었지만 한자음 표기법이 비현실적이어서 오래가지 못하였고 둘째는 우리나라 한자음을 기초로 한 것으로 언해문헌에 연산군 때 채택된 것으로 『육조단경언해』와 『시식권공언해』가 대표적이다. 훈민정음 당년에는 유성마찰음, ㅸ, ㅿ, ㅇ 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제한된 분포로 유성적 환경에만 나타났으나 조만간 소실 될 위기에 있다. 후기 중세국어에서는 이중모음 체계의 특징으로 상향이중모음과 하향 이중모음이 있었다. 중세국어는 성조언어로서 이것은 중세국어와 근대 국어를 구분하는 특징중의 하나이다. 성조는 방점으로 표기한다. 중세국어에서도 경어법이 발달되었지만 현대어와 약간 차이가 있었으며 한자어의 대량 유입과 중국어 어휘도 차용되어 16세기 『飜譯朴通事』, 『訓蒙字會』등에 많이 기록 집중되어있다.

 

-간행자료

『조선관역어』,『화이역어』 속에 들어있고 『화이역어』는 명나라 초엽에 편찬된 중국어와 외국어의 대역어휘집의 총칭으로 네계통이 있고 훈민정음과 동시대의 국어를 훈민정음 아닌 다른 문자로 표기한 점과 이책은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는 점에 특이한 가치를 둔다.

 

-훈민정음체계

『훈민정음』은 창제당시 초선 17자. 중성11자의 28자체계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삼분한 삼분법은 훈민정음의 이론적 기초가 된 독창적 방법으로 초성과 중성을 위해서는 문자를 만들었지만 "종성부용초성" 이리하여 종성에 대해서는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 초성 17자의 제자 원리는 상형의 원리와 가획의 원리로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15C 맞춤법의 1차적 원리는 '음소적'이라 할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 종성해가 'ㄱㅇㄷㄴㅂㅁㅅㄹ' 8종성법도 음소적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2차적 원리로는 '음절적'이라 할수 있으며 가령‘사’의 곡용형은 ‘사미’, ‘사’로 ‘먹-’ 활용형은 '먹고, 머그니로 표기됐다

 

-한자음 표기법에는 『동국정운』의 표기법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부 불경언해에 사용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폐지되었으며 우리나라 한자음의 표기법은 언해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는 연산군 때의 『육조단경언해』,『시식권공언해』가 대표적이며 16세기에는 『훈몽자회』의 표기법이 좋은 편람이 되고 있다.

 

- 자음체계

15세기 국어의 폐쇄음과 파찰음에 평음과 유가음의 두계열이 있었으며 국어 단어에서 '탁성'이 있는데 이것은 된소리로 해석되고 『동국정운』에서 ㄲ, ㄸ, ㅃ, ㅆ, ㅉ, ㆅ 은 탁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합용병서 ㅺ, ㅼ, ㅽ 이들의 'ㅅ'은 15세기 중엽에 된시옷으로 불리어 왔다. 훈민정음의 여러 문자 중에서 'ㅅ'은 음가에 구애되지 않고 사이시옷으로 사용되었으며 15세기 중엽에는 그‘ ’였던 어간이 『법화경언해』와 『두시언해』에서 ‘’로 나타나고 그 전의 문헌에는 ‘딯’(한자)로 나타나던 어간이 『구급간이방』에서는 ‘-’로 나타났다. 동작의 격렬성을 나타낸 어두음이 된소리화된 예들로서 어두 된소리는 15세기 후반보다 앞서 나타난다고 본다. 유성마찰음으로 'ㅸ', 'ㅿ','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되며 제한적 분포를 가지고 있으며 유성적 환경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지만 이들은 제한된 분포 때문에 소실되고 만다.

 

-음절말 자음

음절말에서 자음 대립은 제한적이었고 15세기 중엽에는 음절말 9자음의 대립이 있었으며 15세기, 16세기 교체기의 모음간의 ‘ㅿㆁ’의 'ㅇ'이 소실되어 음절말의 ‘ㅿ’소실되고 ‘ㅅ’과 ‘ㄷ’이 중화된 결과 7자음 체계에 도달하고 15세기 문헌의 '잇니', '이튿날(이듨날)' 등으로 나타나는 바 음절말의 'ㅅ'이 [t]으로 발음 된 결과 'ㄴ' 앞에서 역행 동화로 '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모음

제자해

중성에 대한 설명으로 국어에 ‘ㆍ ㅡ ㅣ ㅗ ㅏ ㅜ ㅓ’의 7개 단모음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기본 3모음에 대해서는 혀의 모양, 소리의 깊이 등으로 설명하고 4모음에 대하여는 기본 3모음과 관련지어 입모양으로 설명했다. 모음 체계의 수립은 각 모음의 정확한 음가 결정을 전제로 하고 음가 결정에 적합한 자료로는 국어를 외국 문자로 표기한 것과 외국어를 정음 문자로 표기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선관역어」의 표기를 보면'ㅗ'와 'ㅜ'가 중국음의 [o]와 [u]에 따라서 구별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중 모음 체계

이중모음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며 상향 이중 모음과 하향 이중 모음이 있었다. 상향 이중 모음으로 y가 앞선 'ㅑ, ㅕ, ㅛ, ㅠ'로 표기되었고 하향 이중 모음으로는 y로 끝난 'ㅣ, ㅐ, ㅔ, ㅚ, ㅟ, ㅢ'로 표기되었다. 모음조화는 명사나 동사 어간에서는 엄격했으나 조사나 어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성조는 중세국어와 근대국어를 구별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성조는 방점으로 표기되고 평성은 무점, 거성은 1점, 상성은 2점. 입성은 방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기에 마련하지 않았으며 평성은 저조, 거성은 고조, 상성은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다. 15C 문헌에서 방점 표기는 매우 정연하고 16세기 「훈몽자회」에서도 방점 표기를 볼 수 있었으며 말엽으로 갈수록 방점 표기가 문란해지고 「소학언해」, 「사선언해」등에서는 방점 표기가 규칙성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이때부터 성조 체계가 소멸된 것을 볼 수 있다.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누고 단일어는 한 형태소로 이루어 진 것을 말하고 복합어는 둘 이상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며 둘 이상의 형태소가 모여 새로운 단어인 복합어가 만들어 지는 것을 조어법이라 하고 복합어에는 합성어와 파생어가 있다.

-합성어

체언의 합성은 현대어와 다를 바 없지만 중세어에서 '수', '안'등의 유기음은 앞 체언들의 말음 'ㅎ'으로, '니' ,‘좁’등에서는 뒷 체언의 두음 'ㅂ'으로 발음되었던 것인데 현대어에서는 'ㅎ'이나 'ㅂ'이 '수탉, '안팎', '입쌀', '좁쌀' 등으로 남게 되었다.

-파생어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접미사를 연결하여 새로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형성된다.

-곡용

곡용에서는 체언 어간이 교체를 보여준 것이 특기할 만 하며 교체에는 자동적인 것과 비자동적인 것으로 현대국어에서는 체언의 어간형 자동교체만 보여주며 비자동적교체는 용언의 어간에서만 볼 수 있으나 중세국어에서는 체언도 용언과 같이 비자동교체를 볼 수 있다. 특수조사도 여럿 있었으며 용법도 다양했고 명사와 용언에서 온 것들인데 체언에서 기원한 것은 속격, 용언에서 기원한 것은 대격, 조격을 지배했으며 격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활용

활용어간은 교체를 보여주며 비자동 교체 일부는 현대 국어에도 남아있다. 의도법은 근대국어나 현대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문법 범주이며 선어말어미 -오/우-로 표시되었다. 시상법 시상의 선어말 어미에는 현재의 ‘-- 과거의 '-거-', '-이/아-'. '-더-' 미래의 '-리-'등이 있다. 감동법의 선어말어미는 '-도다', '-도소니', '-도소이다', '-도-', '-돗-'이 있다. 선어말어미들이 함께 나타날 때의 일정한 배열 순서로는 겸양법-과거-존경법-현재-의도법-미래-감탄법-공손법으로 공식화 할 수 있다.

-어말어미

동명사 어미에는 '-ㄴ','-ㄹ''-ㅁ''-기' 등이 있고 '-ㅁ'은 언제나 의도법의 선어말어미와 결합되어 -옴/움으로 나타나고 '-기'의 용례는 드물었다. 부동사 어미는 매우 다양하였고 정통사 어미는 서법을 나타내며 설명법, 명령법, 의문법, 감탄법의 네가지 서법이 있다. 계사의 활용은 매우 특이하며 형태는 표기상으로 주격과 같으나 특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중세에 계사는 연결이 자유로웠다.

-문장구조

문장의 구조는 대체로 근대나 현대국어와 일치하며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중요한 차이는 종속절의 변형에서 드러나고 종속절의 주어가 속격형으로 변형된 것이고 동명사를 가진 종속절에서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한 문장에서 동격으로 사용된 명사들은 마지막 것만이 필요한 조사를 가지며 이것을 집단 곡용이라 하며 알타이 제어의 특색이다. 한문문장의 영향은 중세어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세어 문장의 가장 큰 특징은 복합문과 합성문이 뒤얽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단문은 거의 없었다.

 

4)근대국어

근대국어 시기는 임진왜란이 지난 직후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이 시기에 한글로 된 문학이 크게 일어났으며 18C와 19C에는 언문소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임진왜란 전과 후의 문헌들 사이에는 문자 체계와 표기법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방점이 완전히 사라지고, 'ㆁ'자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ㅿ'자가 완전히 소멸되어 17세기의 문자는 25자 체계가 되었다. 중세문헌에는 어두에 합용병서가 존재했으나 17세기에 오면서 혼란함속에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문법체계를 비교해 볼 때 현저하게 간소화되어 나타난다. 중세어에서 근대어로 내려오면서 순수한 국어 단어들이 사라져가고 한자어로 대체되는 것이 많았다. 이 시기에 차용어로는 중국어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본래의 한자에 대한 지식을 우리나라 발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만주어 차용어도 보이나 수는 매우 적으며 서양에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새로운 단어들이 국어에 추가된 것들도 있었으며 서양 문물 유입으로 인해 새로운 단어들을 가져왔다.

-자료

근대국어 시기에 한글은 널리 보급되었고 언해서들도 많이 간행되고 한글로 된 문학들이 활발해지며 사역원 계통의 역학서들도 간행되었다. 언해서는 국어사 연구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자료로서 중세국어 중간본도 간행되고 원간본을 그대로 새긴 복간본과 개간본도 많았으나 자료로 이용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임진란이 지난 뒤 맨 처음 나온 문헌은 의서로서 『언해태산 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가 있었으며 역학서로는 『老乞大諺解』, 『朴通事諺解』등으로 국어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임금이 백성에게 내린 조칙인 윤음도 있었다.

 

-문자체계와 표기법

임진란 이전과 이후의 문헌들 사이에는 문자 체계와 표기법에서 확연한 차이가 보이고 임란 이후 15세기 중엽 맞춤법에서 혼란을 겪으며 정제된 새로운 맞춤법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18,19세기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졌다. 문자체계의 변화로 방점이 완전히 사라졌고,ㆁ자가 사용되지 않았고, ㅿ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에서 맞춤법의 혼란 중에서 주목할 것은 어두 합용병서로서 중세문헌에서는 ㅺ ㅼ ㅾ 세가지 합용병서가 존재했지만 17세기에는 소멸되고17세기 초에 ㅺ 이라는 병서가 ㅄㅺ의 새로운 이체자로 등장했으며 19세기에 된소리 표기는 모두 된시옷으로 통일 되었다.

-음운

중세국어의 어두 자음군 ‘ㅳㅶㅷ’ 과‘ㅴ ㅵ’언제까지 존속되었는지 흥미로운 문제중 하나로 17세기에 어두자음군이 된소리가 된 것을 결론 할 수 있고 완성은 중엽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ㅎ 된소리는 17세기 후반 ㅋ으로 합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음 ‘ㆍ’는 16세기에1단계소실 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완전 소실 되었다.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로는 ‘ㆍ’의 소실로 제1음절의 이중모음 ‘ㆎ’가'ㅐ'로 변하고 단모음화의 증거로 움라우트를 들 수 있다.

-음운체계자음체계는 이미 17세기에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ㅎ'’된소리는 17세기에만 존재했고 모음체계는 19세기 초엽에 8모음 체계로 추정된다. 음운 변화는 구개음화로i,y 앞에서 ‘ㄷㅌㄸ’이나 ‘ㄱㅋㄲ’ 이ㅈㅊㅉ로 변하는 현상으로 남부지방 방언에서 일어나 북상한 것으로 보인다.

-원순모음모음변화의 하나에 순음 ‘ㅁ ㅂ ㅍ ㅅㅂ’아래의 모음 ‘ㅡ’의 원순ㅁ화가 있고 이 변화로 중세에 있었던 '므브프 ㅅ브'와 '무부푸ㅅ부'의 대립이 국어에서 없어지게 되고 19세기들어 ‘ㅅㅈㅊ’아래서 ‘ㅡ’가 ‘ㅣ’로 변한 단어들이 보이며 이러한 변화를 전설모음화라 부른다.

-모음조화

16세기‘ㆍ’가 비어두 음절에서 ‘ㅡ’로 변한 사실은 모음조화에 영향을 주었고 어두음절에서 ‘ㆍ’는 양모음 ‘ㅡ’는 음모음 이었으나 비어두 음절에서는 ‘ㅡ’만이 나타나고 부분적인 중립성을 가지게된다.18세기 어두음절에서는 중립성이 깨지고 대립성을 가지게 되며 비어두 음절에서‘ㅗ>ㅜ’가 추가되어 어간 어미 그것을 막론하고 타격을 받게 되었다.

5)현대국어

현대국어의 시기는 20세기 초에서 오늘날까지에 100년 남짓으로 이르며 내외의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전기에는 일본어에 의해 국어가 수난을 겪었으며 후기에는 정치적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에 서로 다른 변화를 입었다. 변화는 어휘에서 현저하게 보이지만 음운과 문법에서도 나타났으며 이 시기에 맞춤법이 제정되고 표준어가 확립되어 문자와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말과 국어사의 시대 구분의 관점에서 대체로 20세기 초에서 지금까지 사용되는 국어를 가리키는 말을 현대국어라고 한다.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어문정리 사업으로, 새로운 문자 체계와 맞춤법을 제정하고 표준어를 확립하여 문자와 언어생활에 표준화를 가져왔다. 표준어의 보급으로 방언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각자 자기지방의 고유한 방언을 잊고 살아간다. 방언으로는 서북, 동북, 서남, 동남, 중부, 제주 방언이 있으며 동북과 동남 방언은 역사적 깊은 관계와 고저가 악센트를 가진 점이 특이하고 서북, 중부, 서남 방언은 음장이 있으며 서북 방언은 구개음화를 모른다. 제주 방언은 육지 방언과 많은 차이를 보이며 성조도 음장도 없다. 모든 자음은 음절말 또는 어말에서 반드시 이파음으로 실현되고 어두에 자음군이 허용되지 않는다. 서울말에는 음장이 있으며 이것은 중세어 성조가 없어지면서 상성의 음장이 남은 것이다. 서울말에서는 중세어에 비자동교체를 보여준 모든 체언의 어간이 단일화 되었으며 곡용에서는 주격의 ‘-이/가’의 교체가 확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대 이후의 변화결과 대명사에서는 1인칭과 2인칭에서 주격형 ‘내가’ ‘네가'’속격형 ‘내'’ ‘네’ 등의 형태가 생겨 났다. 용언의 활용은 근대어와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어의 경어법에는 존경법과 공손법이 있고 현대국어의 문법에서 특기할 것은 영어를 비롯한 구미 제어 영향으로 이들의 직역체가 국어 문법에 광범위하게 침투했음이 보여진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풍부는 현대국어의 현저한 특징이며 약어의 빈번한 사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경향으로 현대국어에 완전히 정착한 듯 보인다.

-자음

자음체계의 특징으로는 폐쇄음, 파찰음, 평은,‘ㅂㄷㅈㄱ’유기음‘ㅍㅌㅊㅋ’된소리‘ㅃㄸㅉㄲ’ 3계열이 있으며 평음은 무성음 또는 유성음으로 유기음은 무성음으로 된소리는 폐쇄를 수반한 무성음으로 실현된다. 마찰음에는 평음 ㅅ과 된소리 ㅆ이 있고 평음 ㅅ은 어두에서 강한 기를 수반하며 모음 간에서는 약화되고 폐쇄음, 파찰음의 평음처럼 무성음으로 실현된다. 모든 자음은 음절말 또는 어말에서 반드시 미파음으로 실현되고 미파음은 중세에서 발달해 현대어에서 극치에 달한다. 현대국어에서는 어두 자음군이 허용되지 않으며 음절구조의 복잡한 것은 '자음+반모음+모음+자음이다.

-모음

현대 서울말에서 '외'와'위'의 발음은 세대에 따라 차이가 나고 모음 'ㅢ'는 음장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고 전설모음 '애'와 '에'의 구별이 흐려지고 있으며 비어두 음절에서는 일반적이며 어두 음절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현대 맞춤법에서는 '의'를 인장하고 있으나 어떻게 해석 하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곡용

서울말에서는 중세어에서 비자동 교체를 보여준 모든 체언의 어간이 단일화 되었고 곡용에서는 주격의‘-이/가’교체를 지적할 수 있다. ‘-가’의 출현은 중세어 말기이지만 근대어 문건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용언 활용은 근대어와 차이가 없으며 중세어에서 특이했던 계사 활용이 현대어에서 용언의 활용이 유추됨을 주목한다.

 

-외국어 영향

문법에서 영어 및 구미제어의 영향을 보면 직역체거 국어체 문법에 침투하였고 체언 뒤에 독립적으로 쓰인 '뿐'등은 일본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 어휘는 현대 서양 학문의 개념들이 대개 한자어로 번역되어 유입되고 있어 국어에는 많은 한자어가 추가되어 있어 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냈고 오늘날 국어 어휘에는 순수한 국어 단어보다 한자어가 더 많다. 관념어나 학술어는 대부분 한자어에 의존하고 고유한 국어 단어보다 한자어가 품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구미제어에서 차용어가 많이 들어온 것도 동양제어에 공통적인 사실로 스포츠용어들은 영어에서예술 요리 용어 등은 불어에서 음악 용어는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사실이며 현대어의 특징으로 의성어와 의태어가 풍부하고 약어 사용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6.결론

언어는 변화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규칙성을 띠고 있으며 이는 음운 변화에서 현격하게 드러나고 있다. 고대국어에서 현대 국어에 이르기까지의 변화 과정과 여러 단계에서 국어의 체계와 발달 과정을 살펴보았다. 언어는 늘 사용하는 것이기에 어느 시대에 급작스레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변해왔고 변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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